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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stella 님의 블로그

살인자의 마지막 양심, 《메모리》 본문

🌿 루시아의 숲정원

살인자의 마지막 양심, 《메모리》

forestella 2026. 9. 17. 22:11

영화의 맨 마지막,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소리 없이 나타나 다바나의 목을 스윽 긋고 사라진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누구지. 혹시 알렉스인가?

하지만 알렉스는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지막 소원이,

마치 그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복면을 벗은 얼굴은 알렉스가 아니었다.

그를 쫓던 형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 짧은 순간, 나는 정말로 알렉스가 아닐까 착각했다.

어쩌면 그 착각이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죽어도, 그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뜻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라도 살아남는다는 것.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은 정말 죽었을까.

총을 그렇게 많이 맞고도 혹시 살아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끝까지 다 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건 알렉스가 살았는가 죽었는가가 아니었다는 걸.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가, 그게 전부였다.

 

알렉스는 청부살인범이다.

그런데 자신의 기억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메모를 한다. 사진을 찍고, 이름을 적고, 중요한 사실을 기록해둔다.

조금 전까지 알고 있던 사람을 몇 시간 뒤에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누구보다 정확했던 사람이,

정작 자신의 기억을 지키는 일에는 점점 속수무책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기억은 흐려지는데, 마음은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의 끔찍한 영상,

그 아이를 죽이라는 의뢰. 알렉스는 그 순간 멈춰 선다.

자신은 살인자이지만 아이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선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결국 죽임을 당하면서 알렉스의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그가 쫓는 것은 돈도, 의뢰도 아니다. 자기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 그것만 남는다.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알렉스가 왜 그렇게 완강했는지.

그와 그의 형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자랐다.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아무 망설임이 없던 사람이, 유독 아이 앞에서만 무너지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자신이 겪었던 폭력의 기억이, 어른이 된 그의 몸속 어딘가에 도덕의 마지막 선 하나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세상 모두에게 쫓기게 된 알렉스가 몸을 숨긴 곳은,

다름 아닌 죽은 아버지가 예전에 운영하던 빵집이었다.

훔친 플래시 드라이브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그 공간은,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었다.

그의 상처가 시작된 자리였다.

아무도 모르게, 가장 아픈 곳으로 돌아가 가장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준비한 셈이다

.

영화 중간중간 알렉스가 메모를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들이 참 아팠다.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한다.

오늘 만난 사람도 기억하고,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하고,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왜 웃었는지도 기억한다.

하지만 알렉스에게는 그 당연한 하루가 당연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종이에 자신을 붙잡아 놓는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그리고 그 메모들이 점점 한 사람의 삶을 대신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알렉스는 결국 다바나를 눈앞에 둔다.

이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철컥. 총알이 없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 탄식이 나왔다.

왜 하필 지금이야. 평생 사람을 죽여온 사람이,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이 하려던 일을 완성할 총알조차 없다.

그리고 죽을만큼 맞고
결국은 경찰의 총에......

 

그렇게 허무하게 알렉스는 가고,

알렉스가 직접 하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한다.

젊은 형사가 다바나를 처리하고,

여형사는 빈센트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준다.

그렇게 알렉스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소원이 이루어진다.

나는 그 장면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아, 이 사람의 마지막 뜻을 알아준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병실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알렉스를 쐈던 젊은 형사가 빈센트와 여형사와 같이 찾아온다.

아마 마음속에는 미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한다.

그 짧은 장면이 참 오래 남았다.

 

누군가는 법을 집행했

누군가는 사람을 죽였고,

누군가는 사람을 보호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는 그 모든 이름표가 잠시 내려진다.

그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바라본다.

 

영화를 보고 나니 기억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걸까.

사건의 순서일까, 사람의 얼굴일까, 이름과 숫자일까.

어쩌면 그것보다 더 오래 남는 건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알렉스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자기가 누구에게 무엇을 했는지도 때로는 헷갈렸다.

하지만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그 아이에게 일어난 일은 잘못되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그 마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지켜낸 것은,

아이였던 자신이 끝내 지켜지지 못했던 그 마음을,

다른 아이에게만은 대신 지켜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메모리》라는 제목이 다 보고 나니 조금 다르게 들린다.

기억은 머리에만 남는 게 아니었다.

어떤 기억은 가슴에 남고,

어떤 마음은 행동으로 남고,

어떤 사람의 마지막 뜻은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은,

내가 무엇을 기억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잊지 않으려고 끝까지 애썼느냐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고,

세 사람은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뜻을 알아주었다.

그들이  알렉스의 눈을 편히 감겨준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어도, 마지막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있겠구나.

그것이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메모리'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사라질 수 있어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