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런웨이에 선 소녀, 김다울을 기억하며
— 화려한 조명 뒤에 남겨진 한 사람의 영혼
비가 내렸다.
예보는 소나기라고 했다.
잠깐 지나가고 말 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비는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봄가뭄에 목말라 있던 산이 천천히 젖어갔다.
나는 하늘그린농장 울타리 주변에 다시 마가목을 심었다.
작년에 비 오는 날
마가목 묘목들을 수레로 끌고 가 하나씩 심어두었던 나무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들이 사라져 있었다.
오늘 다시 살펴보니 알 수 있었다.
뿌리 바로 윗부분에서 바짝 잘린 채 모두 죽어버린것을
그래도 살겠다고 버티는 세 그루가 남아 있었다.
그 작은 생명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아… 이렇게까지 잘려 나가 말라 죽었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내 마음속에는 다른 한 사람의 이름도 함께 떠올랐다.
김다울.
한국의 세계적인 모델.
너무 어린 나이에 세계 패션계의 조명 아래 섰고, 너무 짧은 생을 살다 간 사람.
김다울은 1989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2007년 파리 패션위크를 통해 국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한국 모델로 알려져 있다.
샤넬, 알렉산더 맥퀸, 비비안 웨스트우드, 크리스토퍼 케인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브랜드 무대에서 활동했고, 영국 보그, i-D,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같은 패션 매체에도 등장했다.
그녀는 단순히 예쁜 얼굴의 모델이 아니라, 당시 세계 패션계가 강렬하게 주목한 독특한 존재였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녀의 화려한 이력보다
그 이력 뒤에 있었을 어린 마음을 생각했다.
열세 살.
아직 세상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 배워가야 할 나이.
그런 나이에 그녀는 패션계라는 뜨겁고도 잔인한 세계에 들어섰다.
무대 위에서는 천재적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기운이 있었다.
순종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았다.
어딘가 삐딱하고, 고독하고, 슬프고, 동시에 압도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말했다.
“독특하다.”
“강렬하다.”
“뮤즈 같다.”
“세계적인 모델이다.”
하지만 누군가 한 번쯤은 물어봐 주었을까.
“다울아, 너는 괜찮니?”
“너는 쉴 곳이 있니?”
“너는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도 너 자신으로 남아 있니?”
패션계는 아름다움을 다루는 곳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다루는 모든 세계가 사람을 아름답게 대하지는 않는다.
런웨이의 조명은 눈부시지만, 그 빛이 언제나 따뜻한 햇볕은 아니다.
때로는 사람을 말려버리는 빛이 되기도 한다.
특히 아직 마음의 뿌리가 깊게 내리지 못한 어린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숲에서는 어린 묘목을 함부로 바람 앞에 세우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품종이어도, 아무리 곧게 자랄 가능성이 있어도, 뿌리가 아직 약하면 기다려준다.
햇빛도 조금씩 익숙하게 해주고, 물도 조심스럽게 주고, 풀에 덮이지 않게 뽑아주고 살펴준다.
사람도 그래야 하는데.....
김다울은 모델이었지만, 동시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자기 세계를 표현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블로그를 운영했고, 자신의 감정과 취향, 예술적 감각을 남겼던 사람으로도 기억된다.
그녀의 마지막 블로그 글 제목으로 알려진 문장, “Say hi to forever”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 남았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영원에게 안부를 전해줘.
스무 살의 사람이 남긴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고, 너무 차갑고, 너무 아득했다.
스무 살.
너무 어렸다.
너무 빠르게 피었고, 너무 빠르게 사라졌다.
그래서 마음이 짠하다.
사람이 떠난 뒤에 슬픈 이유는 단지 그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람이 앞으로 살아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모습들이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천재성은 단순히 예쁜 얼굴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분위기를 만들 줄 알았다.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이 가진 감정과 시대의 공기를 몸으로 통과시키는 사람이었다.
김다울에게는 다 피지 못한 봄이 있었다.
다 그리지 못한 그림이 있었다.
다 쓰지 못한 문장이 있었다.
다 걷지 못한 길이 있었다.
오늘 비가 내리는 산에서, 나는잘려나간 마가목을 다시 심으며 그녀를 생각했다.
잘려도 뿌리에서 다시 살아보려는 나무들.
너무 일찍 뜨거운 세계에 세워진 어린 사람.
보호받지 못한 채 세상의 시선 앞에 놓였던 영혼.
그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오늘 내 마음속에서는 이상하게 겹쳐졌다.
어린 생명은 기다려주어야 한다.
재능 있는 사람일수록 더 조심스럽게 돌봐야 한다.
빛나는 존재일수록 더 뜨거운 조명보다, 깊은 그늘과 따뜻한 물이 필요하다.
나는 오늘 그녀에게 늦은 말을 건네고 싶었다.
다울아.
너를 너무 늦게 알았다.
너의 죽음보다, 너의 생을 먼저 기억하고 싶다.
너의 마지막보다, 네가 품고 있던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먼저 떠올리고 싶다.
세상은 너를 모델이라 불렀지만,
너는 단지 옷을 입고 걷던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자기 안의 고독과 감각을 어떻게든 표현하려 했던 어린 예술가였다.
오늘 하늘그린농장에는 비가 내렸다.
봄가뭄에 지친 산이 물을 마셨다.
마가목 뿌리에도, 우물가 탱자 새싹에도, 내 마음에도 비가 스며들었다.
산은 조용히 젖었고,
마가목은 다시 뿌리를 붙잡았고,
나는 한 어린 영혼에게 아주 늦은 인사를 건넸다.
편히 쉬어요, 다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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