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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stella 님의 블로그

김오랑ㅣ그가 지키려 했던 것 본문

🌿 “숲결 리더십 다이어리”

김오랑ㅣ그가 지키려 했던 것

forestella 2026. 10. 4. 08:51

― 기억해야 할 사람의 서가에 한 분을 더 모시며

사람의 일생을 돌아볼 때
마지막 장면만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특히 군인의 삶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마지막 순간의 용기만 바라보면
그 사람이 평생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놓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김오랑.

저는 그분을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었습니다.
'참군인'이라는 말 하나, 그리고 이상하게 애려오는 마음 하나.
그래서 오늘은 그분의 마지막 몇 분이 아니라,그보다 훨씬 긴 시간의 김오랑을 만나보려 합니다.

김해의 한 소년

김오랑은 1944년 경남 김해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공부를 잘했습니다. 김해농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도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문제였습니다. 합격증을 손에 쥐고도 등록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 육군사관학교 25기로 들어갑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문이 하나 닫혔을 때, 그 앞에 주저앉지 않고 다른 문을 찾아 걸어간 열여덟, 스물 즈음의 청년.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69년 소위로 임관해 전방 수색대 소대장으로 일했고,
1970년에는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습니다.

젊은 장교에게 전쟁은 교과서에 없는 것을 가르쳤을 겁니다.
명령의 무게.
동료를 믿는다는 것.
부하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것.
그리고 자기 선택에 책임진다는 것.

특전사, 그리고 한 사람의 곁

귀국 후 그는 특전사에서 중대장과 작전·정보 장교를 거쳤고,육군대학을 마친 뒤 다시 특전사로 돌아옵니다.
1979년에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여기까지의 시간을 따라오고 나면
1979년 12월의 그 몇 분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그날 갑자기 용감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훈련과 전선, 책임과 지휘로 쌓인 시간이 가장 어려운 순간에 하나의 선택으로 나타났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나무가 그렇습니다.
태풍이 오는 날 갑자기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없습니다.
그 뿌리는 이미 수많은 계절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어져 있었을 겁니다.

군복 밖의 김오랑

저는 이 부분을 꼭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에게는 백영옥이라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1972년 12월 23일 정오에 결혼했습니다.
백영옥 여사는 훗날 자신을 '12월의 여인'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12월에 태어나 12월에 결혼했고, 12월에 남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백 여사가 남긴 자전 에세이 『그래도 봄은 오는데』에는 결혼 전 주고받은 편지와 함께 이런 문장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은 신앙과 같은 것. 당신을 사랑하오."

짧은 문장이지만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결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김오랑은 군복을 입은 장교였지만 집에 돌아오면 한 여인의 남편이었습니다.
강인한 특전사 군인과 아내를 아끼는 따뜻한 남편.
저는 그 두 모습이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안에 처음부터 함께 있던 모습이었을 겁니다.

평전의 한 장 제목이 '아내의 눈이 되어'라고 합니다.
그 제목을 읽고 한참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그 남편은 아내의 눈이 되어주던 사람이었는데,훗날 아내가 정말로 빛을 잃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겠지요.

1979년 12월 13일

1979년 12월 12일 밤, 군사반란이 일어났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한 병력이 특전사령부로 들어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반란군 쪽으로 돌아선 가운데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 곁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총격전 끝에 가슴과 배 등에 여섯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서른다섯.

한 사람의 인생을 말하기엔 너무 짧은 나이입니다.
그의 곁에는 열한 해를 함께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해 아내의 생일은 12월 16일이었습니다.
생일을 며칠 앞둔 겨울이었습니다.

그가 지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이 질문을 오래 생각해봅니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한 사람의 상관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군인은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모든 명령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군인의 충성은 때로 아주 어려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그는 그 질문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참군인'이라 부릅니다.
그 말이 거창해서가 아니라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자리 때문일 겁니다.

남겨진 사람

그날 이후 가장 큰 빈자리를 마주한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백영옥 여사는 남편을 잃은 충격 속에서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살던 군인 아파트에서도 나와야 했습니다.
남편이 국립묘지에 묻힌 뒤 수없이 그 묘를 찾아가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도 함께 묻혔다"고.그녀는 이름도 바꿨습니다. 백수린.
'물가의 외로운 기린'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부산에서 불교에 귀의해 장애인 시설과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봉사했고,
남편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애썼습니다.
1990년 남편이 중령으로 추서된 것도 그의 끈질긴 노력 덕이었습니다.
1988년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래도 봄은 오는데』를 펴냈습니다.
이 책은 당시에는 널리 배포되지 못했고, 35년이 지난 2024년에야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동초처럼 모진 겨울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12월의 여인"이 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인동초는 겨울에도 푸른 잎을 다 놓지 않는 덩굴입니다.
산에서 그 잎을 볼 때마다 저는 눈 속에서도 끝내 푸른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1991년 6월,백영옥 여사는 마흔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경찰은 실족사로 처리했지만,
눈이 보이지 않던 그가 한 번도 혼자 오른 적 없는 건물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 죽음에는 지금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남편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을 보지 못한 채였습니다.

 

저는 이 책의 제목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도 봄은 오는데.
그런데 이제는 그 제목을 읽을 때마다 이 봄이 누구에게 먼저 왔어야 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47년의 시간

김오랑의 죽음은 오랫동안 '순직'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2022년, 국방부는 그의 사망 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바로잡았습니다.
군인사법상 전사에는 적과의 교전뿐 아니라 무장폭동·반란 등을 막으려다 사망한 경우도 포함됩니다.

2026년 3월 기존 보국훈장이 취소되었고, 6월 국무회의에서 충무무공훈장 추서가 의결되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 10월 1일,
제78주년 국군의 날 계룡대 기념식에서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하사에게 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정선엽 하사는 국방부 지하 벙커 초소를 지키다
무장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스물셋의 나이로 전사한 젊은 군인입니다.
그날 이 두 이름이 나란히 불렸습니다.
한 사람은 서른다섯, 한 사람은 스물셋이었습니다.

 

훈장은 유족인 조카분께 전해졌습니다.
조카 김영진 씨는 젊은 군인들이 국민을 지키는 책임감과 고인의 군인정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47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훈장을 김오랑의 삶의 결론으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훈장은 마지막에 놓인 하나의 기록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훈장을 가장 먼저 받았어야 할 한 사람이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조용히 적어두고 싶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김오랑

저는 훈장을 받은 김오랑보다 훈장을 받기 전의 김오랑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학비가 없어 합격증을 접어야 했던 김해의 수석 졸업생.
다른 문을 찾아 육사로 들어간 청년.
부하를 이끌던 소대장.
베트남 전선을 건너온 장교.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아내를 살피던 남편. 그 모든 시간이 쌓여 1979년 12월의 김오랑이 되었습니다.

참군인이란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책임을 다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자기 자리를 지키고, 부하를 책임지고,
가족을 사랑하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해내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 쌓인 삶이 아주 어려운 순간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선택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선택은 그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마지막 문장이었을 겁니다.

서가에 모시며

저는 정치적 구호로 그를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한 시대에,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책임을 다했던 한 군인을,
그리고 그 곁에서 한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인을 함께 기억하고 싶습니다.

 

기억은 비석이 되기 전에 먼저 누군가의 마음에 심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묘목 한 그루를 심는 일처럼요.
당장 그늘이 되지는 않지만,누군가 해마다 들여다보고 돌보면 언젠가 숲이 됩니다.

오늘 저는 제 기억의 서가에
이 두 분의 이름을 나란히 꽂아둡니다.

김오랑.
군인이기 전에 한 사람이었고,
한 사람으로서 사랑했으며,
군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다했던 사람.

백영옥.
그 사랑을 끝까지 기억하려 했던 사람.
빛을 잃고도 봄을 기다렸던 사람.

한 시대가 지나가도
잊지 않아야 할 이름으로.

 

ㅡ 여성임업인 루시아


자료를 찾아보며

김준철의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 백영옥(필명 백수린) 여사의 자전 에세이 『그래도 봄은 오는데』, 국방부·국방일보 및 2026년 6월과 10월의 관련 보도, 당시 언론 기사를 함께 대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