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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stella 님의 블로그

정선엽ㅣ 그날, 그는 초소를 떠나지 않았다 본문

🌿 “숲결 리더십 다이어리”

정선엽ㅣ 그날, 그는 초소를 떠나지 않았다

forestella 2026. 10. 4. 10:05

― 이름이 알려지지 못했던 참군인, 정선엽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잠시 그의 계급을 잊었습니다.

병장이라는 것도, 국방부 헌병이었다는 것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사했다는 것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그저 한 청년이 보였습니다.

스물세 살.
군복이 잘 어울렸고, 표정에는 아직 젊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전사자'라는 말보다 먼저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에게도 돌아가야 할 내일이 있었을 겁니다.
학교로 돌아가고, 공부를 계속하고,부모님 곁에서 자기 삶을 살아갈 내일.

그런데 그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정선엽은 1956년 6월, 전남 영암 금정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형과 함께 광주로 유학했고 조선대학교부속중학교와 동신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동문들은 그를 평범한 학생으로만 기억하지 않습니다.
의협심이 강해 동창과 후배들을 이끌던 학생이었고, 친구들 여덟 명을 모아 흥사단 광주지부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하고
그 안에서 자기 몫을 찾으려던 소년이었던 모양입니다.

1977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77학번.
대학생활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그는 입대했고, 국방부 헌병으로 복무하게 됩니다.

 

친구들은 군복 입은 그의 모습이 유난히 잘 어울렸다고 기억합니다.

그에게 군대는 어쩌면 삶의 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전역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1979년 12월, 전역까지는 석 달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제대 뒤의 길을 가늠해보던 청년이었습니다.
그 통화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밤

군사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은 국방부를 장악하려고 들어왔습니다.

정선엽은 국방부 지하 벙커 초소에서 초병 근무를 서고 있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장한 병력이 몰려오자 많은 초병들이 총을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소총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1979년 12월 13일 새벽 1시 40분께, 그는 반란군에 가담한 1공수여단 병력의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저는 정선엽을 영웅으로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전역을 석 달 앞둔 병장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맞서야 할 의무를 누군가 그에게 특별히 지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 시간, 그 자리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는 영웅이 되려고 초소에 선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자기가 맡은 자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그 단순함이 저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산에서 일하다 보면 알게 됩니다.
가장 오래 버티는 나무는 눈에 띄는 나무가 아니라
제 자리에 뿌리를 내린 채 한 계절도 거르지 않은 나무라는 것을요.

 

그의 이야기는 총성이 멎은 뒤에 더 길게 이어집니다.

"아들에게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영암에서 서울로 달려온 어머니는 아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고 합니다.

그 뒤 가족은 오랫동안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불면에 시달리다 아들의 사진과 앨범을 태우며 아예 잊으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가족이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전해 들은 것은 열 해가 지난 뒤, 한 병사의 입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1995년에야
그때 총을 순순히 내주었다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하는 한을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고 합니다.

 

신군부 쪽에서는 그가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습니다.
가족의 눈물겨운 탄원 끝에 겨우 서울 국립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순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반란에 맞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일로 기록된 겁니다.

 

 

그가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7년 4월, 광주 동신고 총동문회는 모교 운동장에서 정선엽 동문을 기리는 헌수식을 열었습니다.
나무를 심어 기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해, 한 신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다고 합니다.
형은 개인적으로는 모두 용서했지만국가 차원에서는 바로잡아야 한다며,
동생에게 훈장이라도 추서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요.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아홉 해가 더 걸렸습니다.

2022년 12월, 국방부는 43년 만에 그의 사망 구분을 '순직'에서 '전사'로 바로잡았습니다.
2023년에는 영화 〈서울의 봄〉이 계기가 되어 영암에서, 동신고에서 추모와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2024년 2월에는 조선대학교가 그에게 명예졸업증서를 수여했습니다.
2025년에는 병장에서 하사로 추서 진급되었습니다.

스물세 살에 학교를 떠난 학생이 마흔일곱 해가 지나서야 졸업을 했습니다.
그 졸업식에 정선엽 본인은 없었습니다.
사진 속에서는 여전히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육군본부 벙커를 지키다 전사하는 병장,
조민범 병장의 실제 인물이 정선엽입니다.

영화에서는 극적 구성을 위해 인물과 상황이 달라졌지만 그 바탕에는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제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때로 한 사람의 증언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영화 한 편으로 다시 깨어납니다.
그러나 영화가 그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가 그날 실제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먼저입니다.

 

2026년 10월 1일, 제78주년 국군의 날.
충남 계룡대에서 정선엽 하사에게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훈장은 동생 정규상 씨가 받았습니다.
정규상 씨는 형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챙기던 사람이었다고 기억을 전했습니다.

저는 이 한 줄이 훈장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세심하게 사람을 챙기던 형.
그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가 맡은 자리를 세심하게 지켰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훈장이 그의 죽음을 값지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 그가 한 선택이 훈장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훈장은 훗날 국가가 그의 공적을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일 뿐입니다.

정선엽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1979년 12월 13일 새벽, 그가 초소에 서 있던 그 순간입니다.

 

저는 김오랑 중령과 정선엽 하사를 나란히 세워 누가 더 위대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분은 서른다섯 살의 장교였고,한 분은 스물세 살의 병사였습니다.
한 분은 사령관 곁을 지켰고,한 분은 맡은 초소를 지켰습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책임으로.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공통점은 하나였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두 분 곁에는 끝까지 그 이름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명예를 위해 눈을 잃고도 봄을 기다리던 아내가 있었고,
아들의 사진을 태우고도 한을 안고 살았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저는 정선엽의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참 듬직합니다.
그런데 그 듬직함보다 젊은 미소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군인이기 전에
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한 형제의 동생이었고,유학을 꿈꾸던 스물세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를 훈장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기억은 비석이 되기 전에 먼저 누군가의 마음에 심기는 것이라고,
김오랑 중령의 글에 적었습니다.
정선엽 하사를 위해 동신고 운동장에 심어진 그 나무가  어느새 몇 해를 자랐을 겁니다.
저는 오늘 제 기억의 서가에서 그 옆에 한 그루를 더 심는 마음으로 이 이름을 적어둡니다.

정선엽.
1979년 12월 13일 새벽, 그는 초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47년이 지나서야 국가는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부를 차례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못했던 참군인.
그리고 너무 일찍 하늘로 떠난
대한민국의 한 아들.

 

 

ㅡ 여성임업인 루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