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향긋함이 코끝에 닿아 돌아보니, 어제 꺾어 온 산국이었다.
창가에 걸어 둔 작은 바구니에 노란 산국이 한 아름 피어 있다.
바구니 아래로는 조개 장식이 달린 드림캐처가 조용히 매달려 있고,
창밖에는 가을빛이 은은하게 번지고 있다.
밖에는 가을빛, 방안에는 산국 향기.
둘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사진에는 다 담기지 않는다.
눈에 담기는 가을빛도, 코끝에 스며드는 향기도, 그 순간 마음에 내려앉는 평온함도.
산에서 만난 꽃을 집으로 데려왔을 뿐인데, 집 안에 가을이 들어앉았다.
나는 이런 순간이 좋다.
대단한 일이 생기지 않아도,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
익숙한 창가에서 문득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이 있다면,
이런 작은 것들이 전보다 더 잘 보인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랑과 오래 살다 보니 나도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기대가 커지면 서운함도 커진다는 것.
내 생각만큼 상대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고,
그 마음을 꺼내 놓다 보면 말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하고, 나머지는 내려놓고 살자.’
부부 사이에 대화가 중요하다는 말도 맞다.
다만 모든 마음을 그때그때 다 풀어놓지 않아도 평화로운 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다리며 속을 끓이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루의 기분까지 접어 버리지 않는 것.
그렇게 사는 편이 적어도 내 마음에는 좋았다.
그렇다고 신랑이 미운 것은 아니다.
오래 함께 산다는 건
좋아하는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한집에서 같이 사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요즘 신랑이 가끔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포테이토칩을 슬쩍 사다 놓기도 하고, 홍시를 사 오기도 한다.
꽃다발도, 근사한 말도 없지만.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했다가 사다 놓을 뿐이다.
기대를 내려놓고 나니, 예전 같으면 지나쳤을 이런 마음이 눈에 들어온다.
‘어라? 이 양반이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있었네?’
혼자 피식 웃음이 난다.
서운함이 과자 한 봉지와 홍시 몇 개로 말끔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 마음을 못 본 척할 필요는 없겠지.
사람이 꼭 말로만 마음을 표현하는 건 아니니까.
어쩌면 신랑은 신랑 나름의 방식으로 마음을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일은 내가 직접 하는 편이 빠르다.
그림을 걸어 달라고 기다리다가 결국 양면테이프를 붙여 직접 벽에 붙여 버렸다.
하필 조립식 관리사 벽이라 못을 박기도 어렵다.
그림은 마음에 드는데, 거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래도 그림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으면, 그걸로 됐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하나 있다.
붉은 꽃 아래 얼룩무늬 돼지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있는 그림이다.
어른 돼지들의 눈매는 제법 야무지고, 아기 돼지들은 순하고 귀엽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돼지도 아니고, 복 많이 받으라고 돼지를 잔뜩 그려 넣은 그림도 아니다.
그저 몇 마리가 꽃 아래 모여 있을 뿐이다.
그 그림을 보며 생각했다.
‘딱 저 정도만 행복하면 좋겠다.’
큰 욕심 없이, 서로 너무 힘들게 하지 않으면서, 각자 제 몫을 하며 사는 것.
내 농장이 조금씩 나아지고,
내가 가꾸는 산이 건강하게 자라고,
가족들이 무탈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나도 좋아하는 꽃을 바라보고,
공부도 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내 시간을 누리는 것.
그 정도면 참 좋겠다.
행복은 꼭 더 많이 가지는 데서 오는것은 아니다.
가끔은 더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오고,
이미 곁에 있는 것들을 알아보는 데서 오기도 한다.
살다 보면 다시 욕심도 생기고 서운한 일도 생기겠지.
그래도 이제는 안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오늘도 창가에는 산국이 피어 있다.
밖에서 데려온 꽃 한 다발이 집 안 공기를 바꾸고,
평범한 하루에 작은 기쁨을 보태 준다.
신랑은 신랑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간다.
가끔은 마음이 맞지 않고, 가끔은 뜻밖의 다정함에 웃기도 하면서.
오래 함께 산다는 건 서로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다른 점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신랑이 사다 놓은 홍시가 생각나고,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나를 웃게 할지 모르겠다.
산국 향기가 은은한 창가에서 잠시 생각한다.
더 바라지 않아도 좋은 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곁에 두고, 내가 좋아하는 삶을 조금씩 가꾸어 가는 날.
딱 그만큼의 행복이면, 오늘은 충분하다.
ㅡ 여성임업인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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